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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대 최고의 댄스가수 <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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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까지  작성일 : 2005-08-07 07:55:50  조회 : 6735 


7살의 어린 나이에 미8군 무대를 통해 가수활동을 시작했던 효녀 가수 나미. 그녀는 댄스가수의 효시인 60년대 이금희, 70년대 김추자의 계보를 잇는 80년대 최고의 댄스가수였다. 곡마다 컨셉을 달리하는 특이한 헤어스타일과 의상, 춤, 그리고 독특한 무대 연출은 자신의 음악을 돋보이게 하려는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폭넓은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그녀는 음악외적인 연출력에만 의존하기보다는 무엇보다 가슴으로 파고드는 섹시한 허스키보이스로 무장했던 가창력의 가수였다. 여가수로는 최초로 랩과 디스코를 리믹스했던 최대 히트곡 '인디언 인형처럼'은 신선했다. 청소년층에는 가히 '나미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그녀는 80년대 최고 슈퍼스타 조용필과 더불어 최고 여성 슈퍼스타였다.

본명이 김명옥인 나미는 1957년 10월 1일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읍에서 미군을 상대로 해적음반 레코드점을 경영했던 부친 김종은씨와 모친 김귀례씨의 1남 4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아버지가 경영하는 레코드가게에서 팝송과 더불어 성장했다. 네 살 때부터 하루종일 틀어대는 최신 유행 팝송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반을 구입하러 온 미군들은 앙증맞게 춤을 추며 재롱을 부리는 네 살짜리 꼬마에게 홀딱 반해버렸다. 이내 동두천 일대에선 '똘똘이 춤'을 추는 그녀를 모르면 '소련에서 보낸 간첩'으로 통했을 정도. 일곱 살 때 미군장교의 소개를 받은 미8군 쇼 프로모터가 찾아왔다. 반신반의했던 프로모터는 귀여운 꼬마 소녀의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에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8군 무대에서 부른 첫 노래는 레이 피터슨의 '코리나 코리나'와 폴 앵카의 '오 캐롤'등 당시 최고의 히트팝송들. 깜찍한 율동과 더불어 간드러지게 부르는 7살 소녀는 미군들의 혼을 빼놓았다. 동두천의 극장들을 물론 서울의 극장들에서도 쇼 출연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딸의 예상치 못한 인기에 부친은 레코드점을 정리하고 쇼 가수로 키우기 위해 서울로 이사를 결심했다.

동두천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 후암동으로 이사를 해 삼광초등학교로 전학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아버지를 따라 시내 곳곳의 극장무대와 미8군 무대에서 매일같이 노래를 불렀다. 당시 국내 쇼 무대는 박활란, 하춘화, 오은주등 꼬마 스타들의 전성시대였다.

나미는 발군의 춤 솜씨와 노래재능으로 단숨에 장안의 화제로 떠올랐다. 5학년이 되자 당대 최고 인기가수 이미자씨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엘레지의 여왕'에 어린 시절의 이미자 역을 맡으며 배우로 데뷔했다. 이듬해에는 미니스커트 열풍을 일으켰던 가수 윤복희씨의 인생을 그린 '미니 아가씨'에 꼬마 윤복희로도 출연했다.

70년 상도여중에 입학, 2학년이 되던 71년 새롭게 결성된 5인조 여성 록 그룹'해피돌즈'의 멤버가 되었다. 당시 멤버들은 기타와 플롯 겸 보컬에 김명옥(나미), 기타 겸 섹스폰 김승희, 베이스 이종숙, 기타 겸 트럼본 김승미, 드러머 김은숙이었다. 이중 김승희와 승미는 친자매였다.

단장 유칠완씨의 지도로 몇 주간의 연습 후 미8군 쇼 오디션에 응시 AA라는 높은 점수로 8군 무대에 진출했다. 당시 미8군 무대에는 또 다른 10대 여성밴드 서울패밀리가 있었다. 인기 경쟁을 벌였던 두 팀은 사이좋게 월남참전 미군 위문 공연단으로 베트남에 갔다.

당시 그녀의 레퍼토리는 다미타 조의 'IF YOU GO AWAY'나 잭슨 파이브의 'BEN'등. 2년 간의 위문공연 생활은 고된 시절이었다. 노래하다 무대 옆으로 베트콩들이 쏘아대는 박격포 탄이 터져 마이크를 내던지고 피신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73년 2월, 부산항을 통해 귀국한 해피돌즈는 소공동 라스베가스클럽에 출연하며 미국진출을 꿈꿨다. 당시 해피돌즈는 트리퍼즈, HE6, 키 보이스, 라스트 찬스 같은 기라성 같은 남성 록 그룹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인기를 누렸다. 73년 가을, 미국 진출 꿈이 상사되어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첫 무대는 하이아트 리전시 호텔의 나이트 클럽. 달콤하고 감미로운 사운드나 춤추기 좋은 고고음악 위주로 활동했던 해피돌즈는 세계 록의 흐름을 주도하는 그곳에선 닷새만에 쫓겨나고 말았다. 당시 미국 샌프란시스코는 제퍼슨 에어플레인등이 주도하는 히피 운동과 사이키델릭 세상이었다. 피나는 연습 후 현지 밴드들에 뒤지지 않는 수준이 되었다.

당시 해피돌즈의 한달 보수는 4천 달러 정도. 나미는 용돈을 쓰고도 매달 1백 달러 씩 서울에 계신 부모님께 송금했던 효녀였다. 이들은 5년 간 미국 전역을 돌며 잭스 파이브, 오스먼드 패밀리등의 히트곡과 '아리랑'을 빠트리지 않고 불렀다. 나미는 이 시절의 무대활동을 통해 최신 음악감각을 체득하며 역량을 쌓았다.

1976년, 이국적인 용모로 밤무대에서 귀여움을 받던 그룹 해피돌즈는 캐나다 토론토의 한 레코드사에서 데뷔앨범을 발표했다. '아리랑','김치 깍두기','미스티 블루'등이 수록된 앨범은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미스티 블루'를 부르는 나미는 제법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5년에 걸친 장기 해외공연은 향수병을 일으켰다. 떠날 때 15세 소녀였던 그녀는 1978년 스무살 처녀로 돌아왔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미국으로 떠날 계획이었지만 뒤늦게 남동생이 임파선 암으로 세상을 떠난 사실을 알게 되면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 바람에 해피돌즈는 해산이 되었다.



귀국 후 휴식을 취하던 나미는 솔로 가수로 국내 무대에 복귀하기로 결심하고 록 그룹 '검은 나비'의 오디션에 응했다. 이때가 1979년. 헌데 오디션을 지켜보던 이탈리아 출신의 일본 빅터 레코드사 전속 작곡가 프랑코 로마노가 원더풀을 연발하며 자신의 로마노 밴드 객원 가수로 나미를 영입했다. 귀국 첫 복귀 무대는 타워호텔 나이트클럽이었다.

활동을 시작하자 곧 소문이 났다. 블루벨즈 출신으로 남성듀엣 '머슴아들'의 멤버였던 장세용이 찾아 와 매니저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나미와 프랑코 로마노 밴드를 그룹 '나미와 머슴아들'로 합쳐 첫 앨범을 제작했다.

하지만 비자문제로 밴드 멤버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솔로로 나섰다. 데뷔 앨범 중 트로트 곡 '미운 정 고운 정'과 댄스 곡 '영원한 친구'가 좋은 반응을 얻었다. 본명인 김명옥 대신 나미라는 예명을 사용한 것이 이때부터. 나미는 육감적인 외모와 우수에 젖은 허스키 보이스에 색소폰, 풀룻, 기타, 베이스, 피아노 등 못 다루는 악기가 없었던 음악적 재능으로 더욱 인정 받았다.

음반 발매 6개월만에 '미운정 고운정'은 2주 연속 가요 차트 1위를 차지하며 기염을 토했다. '영원한 친구'도 대학가에서 응원가로 애창될 만큼 단숨에 스타로 떠올랐다. 덩달아 밤업소 출연료가 엄청나게 오르면서 동생의 투병생활로 기울어졌던 가세 또한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이후 소속사 문제로 매니저 장세용과 일본에서 돌아온 로마노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면서 다소 주춤했다. 하지만 82년 11월 지구레코드와 거금 3,000만원을 받고 2년 계약을 맺는 것으로 인기를 새삼 확인했다. 그녀의 첫 전속무대는 리버사이트호텔 나이트클럽. 이곳에서 80년대의 슈퍼스타 조용필과 함께 무대에 섰다.

이후 가요계에는 나미를 필두로 방미, 미애, 미희 등 '美자 여가수 선풍'이 일었다. 그룹 출신인 나미는 트로트 가수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 스타 작곡가 이범희와 손을 잡고 9곡에 1,500만 원이라는 가요사상 최고액의 작곡료를 지불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일반적인 곡 당 작곡료는 3~5만원 수준이었다.

하지만 국내 활동 시작부터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프랑코 로마노가 폐암으로 83년에 사망한 것은 아픔이었다. 이듬해에는 트위스트와 록큰롤을 믹스한 듯한 '빙글빙글'을 발표, 새로운 물결을 주도했다. 언론은 '전국이 빙글빙글 신드롬에 걸렸다'며 나미를 '뉴웨이브 가요'의 선두 주자로 대접했다. 당시 전 세계는 마돈나, 신디 로퍼등 뉴웨이브 풍 여가수들의 전성시대였다.

나미는 '빙글빙글'을 위해 의상을 경쾌하고 단순하게 변화시킨 것은 물론, 춤도 파도처럼 흐느적거리게 만드는 등 새로운 시도를 했다. 이 노래는 85년 최다 방송 가요로 기록되고 KBS-TV '가요 톱 10'에서 5주 정상을 고수해 골든 컵의 영예를 안겨 주었다. 2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한 이 음반은 당시 KBS 라디오 조사에 의하면 주한 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인기 가요이기도 했다. 인기몰이는 일본 킹레코드에서 싱글음반을 발표하는 등 일본무대 진출 길까지 터 주었다.

'디스코의 요정'으로 떠오른 그녀는 5집 앨범에서 각기 개성이 다른 '유혹하지 말아요', '보이네', '슬픈 인연', '나비' 등 4곡을 동시에 히트시켜 화제의 주인공에 올랐다.

결국 85, 86년 KBS, MBC 등 양대 방송은 그를 10대 가수상의 정상에 등극시켰다. 솔로 활동 7년만인 86년 그녀는 '나미와 불새'라는 7인조 그룹을 결성해 해외 진출을 꿈꾸기도 했다. 87년 3월엔 신곡 발표 및 팬 클럽 결성을 위해 국내 첫 디스크 콘서트를 개최했다.

또한 에바스 화장품 CF모델로도 나서고 87년 '사랑이란 묘한거야'로 골든 디스크상을 수상하는 중단 없는 히트 퍼레이드를 벌였다. 88년엔 앙드레김과 롯데호텔에서 패션쇼를 겸한 조인트 디너쇼를 열기도 했다. 89년 3월 트로트 열풍을 감지한 그녀는 발라드 풍의 트로트 가수로 다시 변신을 꾀했다. 6집 '미움인지 그리움인지'로 가요 차트에 다시 진입한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홍보도 하지 않은 '인디언 인형처럼'이 심상치 않은 반응을 몰고 왔다. 팬들은 댄스가수 나미를 원했다. 이에 평범하게 불렀던 이 노래를 DJ 붐붐과 함께 색다른 패턴으로 재 취입을 시도했다. 독특한 춤과 더불어 랩을 도입해 리믹스 댄스 뮤직으로 거듭난 '인디언 인형처럼'은 가히 폭풍 같은 반응을 일으켰다.

특히 나미의 헤어스타일은 새로운 유행의 기준이 되었다. 서울 시내 미용실에는 나미의 '추장머리 스타일'을 요구하는 고객들이 줄을 섰고 인형 가게에선 벌거벗은 모습으로 춤을 추는 검은 인디언 인형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청소년층에는 가히 '나미 신드롬'이 생겨났다.

마침내 KBS2 TV ‘가요톱10’에 2주 연속 재등극하면서 이 곡은 최대의 히트곡이 되었다. 그 결과 87년에 이어 90년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하고 진유영 감독의 영화 '독재 소공화국'에 발탁되는 행운까지 안았다.

이후 사생활 문제 등으로 침체에 빠진 그녀는 92년 윤시내와 함께 한 조인트 음반 발표 후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5년만인 96년, 댄스곡 '설득' 등 싱글 앨범을 발표하며 활동을 재개한 그녀는 97년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개인콘서트를 열며 건재를 과시했다.

이후 2000년 반포에 한정식 레스토랑 '야미'를 오픈하며 사업가로 변신했다. 현재 나미는 연예기획사 ‘양지기획’의 대표 최봉호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


[ 출처 : 주간한국( http://weekly.hankooki.com/ ) 2003.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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